모바일 메뉴 닫기
 
 

아카이브

제목
2022/01/19 [동아일보] ③“손자만은 험한 일 안 하길”…이주민을 위한 사다리는 없다
작성일
2022.01.19
작성자
공익법률지원센터
게시글 내용

“열심히 공부해서 좋은 대학에 가서 저에게 맞는 과를 찾고 싶어요. 그렇다고 제가 안정적인 회사에 들어갈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요.”


지난해 12월 어느 날, 경기 안산시 선일중학교. 일반계 고등학교 원서를 쓴 뒤 진로 상담을 하던 허가이 이고리(16)의 목소리가 유난히 작아졌다. 평소 유쾌하고 자신감 넘치는 모습과 달랐다.


이고리는 우즈베키스탄에서 온 고려인 4세다. 러시아어와 한국어에 능통한 장점을 살려 통역가를 꿈꾼다. 목표 대학도 정했다. 한국외대나 서울대 노어노문학과. 러시아어를 잊지 않으려 집에선 엄마와 러시아어로 대화한다.


하지만 이런 꿈도 외삼촌을 생각하면 사그라진다. 외삼촌은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한국어학과를 나와 한국에서 러시아어 통역사로 활동했다. 하지만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에 외국인 입국이 급감하며 일감이 끊겼다. 지금 택배 배송을 하고 있다.


‘대학을 나와도 한 직장에서 안정적으로 일하는 게 어려운데 졸업장조차 없으면… 나도 삼촌처럼 될 수 있겠구나.’


이고리 같은 해외동포 자녀는 특성화고 진학을 선호하는 편이다. 경제적으로 넉넉하지 않은 경우가 많아서다. 특성화고 졸업 뒤엔 바로 취업 전선에 뛰어들 수 있다.


한국어 실력이 부족해 실습 중심인 특성화고를 택하는 아이들도 있다. 외국에서 살다가 한국에 온 중도입국 청소년들이 주로 그렇다.


선일중에서도 지난해 이주배경 학생 52명 중 24명은 특성화고를 지망했다. 특성화고 지망생은 예년보다 줄긴 했다. 경기도 내 일반고도 학비가 무상이 됐기 때문이다. 경제적 부담 때문에 망설이던 이주배경 학생들도 일반고에 지원하게 됐다.


“이주배경 아이들은 고등학교 등하교 교통비조차 부담으로 느끼는 경우가 많아요. 학교 공부를 따라갈 수 있을지도 불투명하죠. 일단 고등학교만 졸업하면 외국인전형으로 대학 가긴 비교적 수월하지만 거기까지 가기 위해선 그 이상의 노력이 필요해요.”(임미은 선생님)


이고리는 그럼에도 일반고에 가기로 일찌감치 결심을 굳혔다. 이고리가 1지망으로 쓴 고등학교는 중상위권 성적의 학생들이 지망하는 학교다. 사실 담임선생님은 다른 학교를 추천했었다. 이고리가 내신에서 불리해질 수 있어서다. 하지만 이고리는 흔들리지 않았다. 학습 분위기가 좋은 환경에서 공부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하기 위해서다.


이고리는 꼭 남들이 부러워하는 좋은 대학에 가고 싶다. 엄마 김 옥사나 씨(42)의 바람을 이루기 위해서다. 엄마는 이고리에게 늘 말한다.


“너는 힘든 일 하며 살지 말아라.”


담임인 장군휘 선생님은 이고리의 타고난 언어 감각과 승부욕을 칭찬했다. 언젠가 그 자질이 빛을 발할 것으로 믿는다.


“한국도 단일민족국가에서 다인종국가로 변화하고 있어요. 앞으로 다양한 사람들이 함께 살아가게 되겠죠. 이고리의 이중언어 능력, 활발한 성격은 선입견 없는 사회를 만드는 데 기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14년에 걸친 ‘한국인 되기’


이고리는 세 살 되던 해인 2009년 엄마를 따라 한국에 왔다. 한국에서 올해 13년째를 맞는다. 가족들과는 러시아어를 사용한다. 한국 생활에 익숙해지다 보니 오히려 러시아어가 어색하다. 가족들이 놀릴 정도다.


“이고리, 러시아 발음 어색해졌네.”


이고리는 겉보기엔 한국인이지만 법적 한국인은 아니다. 우즈베키스탄 출신 엄마는 해외동포가 받을 수 있는 F4비자로 한국에 들어온 뒤 한국인 아버지와 재혼했다. 엄마가 재혼한 뒤 한국에서 낳은 동생도 한국인이다.


“전 우리 집에서 돌 같은 존재였어요. 아버지와 동생은 한국인이죠. 엄마도 동포비자가 있어 한국인이나 마찬가지고요. 저만 외국인이었죠.”


지난해까지만 해도 이고리 같은 중앙아시아 출신 고려인 4세는 체류 자격이 불안정했다. 경제 활동을 할 수 있는 F4비자를 받으려면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하거나 대학을 나와야 했다. 이고리는 이 조건을 채우지 못해 10년 넘게 어머니의 동반 가족 자격(F1비자)으로 한국에 머물렀다. 중학교에 입학한 뒤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해보고 싶었지만 할 수 없었다. F1비자는 취업 등 경제 활동이 금지되기 때문이다. 이고리는 1년 마다 출입국사무소에 가서 비자를 갱신해야 했다.



이고리는 이런 생각이 들 때면 꼭 한국의 좋은 대학에 가리라고 마음먹는다.

“할 수 있어. 러시아어를 완벽하게 하잖아. 러시아와 중앙아시아, 지구의 6분의 1을 네 땅으로 만들 수 있어.”

상담을 해주던 임미은 선생님은 이고리를 격려했다. 하지만 이고리의 걱정을 잘 알고 있다. 이고리가 과연 좋은 대학에 가 일감 끊길 걱정 없는 직장에 취직할 수 있을까.

안산시 고려인지원센터 ‘너머’의 김영숙 센터장도 이 점을 안타까워한다.

“한국어 실력 부족으로 학업을 따라가지 못해 학교를 그만둔 학교 밖 고려인 청소년들이 정말 많아요. 똑같은 동포인데 국적에 따라 체류 자격을 달리 주는 것은 차별이에요.”

법무부는 F4비자를 부여할 중앙아시아 국적 고려인 범위를 점차 넓혀 나가겠다고 밝혔다.

이고리는 간신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여러 편견과 싸워야 한다. 법적 한국인은 아니기 때문이다.

“야, 넌 군대 안 가도 되는데 왜 비자 바꾸려고 하냐.”

친구들은 질투 반, 부러움 반이 담긴 농담을 하곤 한다. 이런 말을 들을수록 이고리 마음에는 다짐이 생긴다.

‘반드시 떳떳한 한국인이 되고 말아야지.’

이고리는 F4비자를 받아 병역의무가 생기면 꼭 해병대에 갈 생각이다.

그러던 그에게 올해 선물같이 체류 자격이 주어졌다. 법무부가 이달 3일부터 국내 초·중·고교를 다니는 중국 및 고려인 동포의 미성년 자녀들에게도 F4비자를 부여하기로 했다. F4 비자로는 이고리가 원하던 아르바이트도 할 수 있다. 체류 기간도 3년마다 연장할 수 있다. 기존에는 러시아 국적의 고려인에게만 나이와 상관없이 F4가 주어졌다. 이고리와 같은 중앙아시아 국적의 미성년 고려인은 한국 고등학교를 졸업해야 F4비자가 나왔다. 법무부는 러시아 국적 동포에게는 러시아의 경제규모가 크고 신규 불법체류자 발생 비율이 낮다는 이유로 F4비자를 주고 있다.

이고리는 다행히 체류 자격을 얻었지만 운이 좋은 경우다. 미취학 아동이나 언어 또는 경제적 문제로 학교 밖으로 밀려난 이주 아동들은 이 혜택을 못 받는다. 법무부는 체류 자격을 주며 조건을 달았다. ‘국내 초·중·고교에 재학해야 F4비자를 받는다.’




이고리의 외할아버지인 고려인 2세 김 게오르기 씨(65)도 손자의 고민을 알고 있다. 평범한 한국인으로 좋은 직장, 좋은 가정을 꾸리려는 손자의 분투를 이해한다. 게오르기 씨도 고향에선 ‘엘리트’였지만 한국에 온 뒤 바닥부터 시작해야 했기 때문이다.

게오르기 씨는 이고리가 한국에 오기 1년 전인 2008년 한국 땅을 밟았다. 51세, 남들은 은퇴를 꿈꿀 만한 나이였다. 하지만 아내 이 로자 씨(62)가 당뇨로 한쪽 눈의 시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는 제대로 치료하기 어려운 상황이었다. 게오르기 씨는 먼저 한국으로 유학 간 아들의 생계도 돕고 싶었다.

결국 큰 결심을 했다. 타슈켄트 국립사범대 역사학과 졸업장, 교장까지 지낸 교육자로서의 커리어, 방 4개짜리 아파트, 자동차, 별장까지 모두 가족을 위해 버렸다. 그렇게 한국으로 떠나왔다.

‘할아버지의 땅’에서 그의 첫 일터는 부산의 한 조선소였다. 오전 8시부터 오후 9시까지 하루 13시간 동안 20kg 가까운 장비를 들고 일했다. 매일 밤 손이 저렸다. 게오르기 씨는 끙끙 앓다 몇 달 만에 일을 그만 뒀다. 하지만 부족한 한국어로는 변변한 일을 구하기가 힘들었다. 쌀 농장, 간장 공장, 건설 현장까지 안 가본 곳이 없었다.

“우즈베키스탄에선 펜보다 무거운 걸 들어본 적이 없어요. 그런데 여기에 와선 돌과 쇳덩이를 들었어요. 식용 개 축사에서 일하던 시절은 죽을 때까지 못 잊습니다.”

육체적 고통보다 더 그를 힘들게 한 건 무너진 자존심이었다. ‘교장선생님’은 ‘이주노동자 김 씨’가 됐다. 조선소 일자리를 그만두고 일했던 총각무 농장에서는 농장 주인이 퍼붓는 욕설을 견뎌야 했다.

“한국어를 못 하니 못 알아들을 거라고 생각한 거지. 한국에 오기 전엔 내가 고려인, 한국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오고 나니 아니었어요.”

막상 한국에 오니 철저한 이방인임을 실감한 게오르기 씨. 그래도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한국에서 반드시 성공하고 말겠어.’

그는 어렸을 때부터 ‘한국은 할아버지의 땅’이라는 가족들의 말을 듣고 자랐다. 자식들에게도 입버릇처럼 가르치곤 했다. “한국이 우리의 미래다.”


딸 옥사나 씨에게도 ‘미래의 땅’ 한국은 녹록지 않았다. 옥사나 씨는 우즈베키스탄 현지 대학에서 심리학을 전공했다. 하지만 한국어가 능숙지 않은 그가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일은 아버지처럼 험한 일뿐이었다.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F4비자 소지자는 경제 활동은 가능하지만 청소, 포장, 주방보조 같은 단순 노무에는 종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인력사무소를 수십 군데 돌았지만 그를 받아주는 곳이 없었다.

혼자 아이를 키우는 그의 사정을 딱히 여긴 안산의 한 공장 대표가 몰래 일을 줬다. 옥사나 씨는 3년간 제품에 필름 부착하는 단순 작업을 하며 지냈다. 출입국사무소에서 미등록 노동자 단속을 나왔을 땐 창고에 숨어야 했다. 적발되면 비자가 취소돼 출국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 시절은 아직도 그에게 상처로 남아 있다. 어느 날 공장에서 상사가 그의 엉덩이를 쓱 만지고 지나갔다. 당장 쫓아가 소리를 질렀다.

“나도 열심히 일해요. 내가 외국에서 살았다고 이렇게 해요? 나도 아빠 있어요. 경찰에 신고해요.”

게오르기 씨와 옥사나 씨 부녀는 있는 힘을 다해 돈을 벌었다. 하지만 어린 이고리를 먹이고 입히고, 로자 씨 병원비를 대고 나면 남는 것이 없었다.

네 가족은 입국한 뒤 5년이 넘도록 원룸살이를 했다. 옥사나 씨가 공장 동료였던 한국인 남편과 2013년 재혼한 뒤로는 분가를 했지만 월세로 산다.

이고리는 집에서 공부할 공간도 변변찮다. 이고리의 방엔 책상과 침대를 놓을 공간이 없다. 이고리의 무릎 높이에도 미치지 않는 작고 낮은 테이블 하나가 전부다. 집에서 공부할 공간이 없어 이고리는 시험 기간에 학교에 남아 공부를 한다. 그래도 이고리는 긍정한다.

“오히려 현재 상황을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요. 매일 바닥에서 공부하다 보면 나중에 ‘진짜 책상’에 앉게 됐을 때 얼마나 더 감사하겠어요.”

#1. 한국어가 서툴러 출신국 경력을 살리지 못한 채 단순 노무에 종사한다.
#2. 열악한 노동 환경에 지쳐 한국어를 배우지 못한다.
#3. 한국어가 부족하니 더 좋은 일자리를 찾지 못한다.

이런 악순환을 이고리 가족은 충분히 경험했다. 열심히 노력해도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날 ‘사다리’가 없었다.

기회가 없진 않았다. 옥사나 씨는 법무부의 ‘사회통합프로그램(KIIP)’을 이수하면 영주비자(F5비자)를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한국어, 한국문화, 한국사회 이해 교육으로 구성된 프로그램을 이수하기엔 버거웠다. 465시간가량 교육을 받고 시험에서 일정 점수를 취득해야하기 때문이다. 처음엔 낮엔 공부하고 밤에는 아이를 돌보며 일했지만 역부족이었다. 당장 생계가 너무 급했다.

“일하고, 이고리 밥 주고, 그러면 주말에 공부할 시간 딱 4시간 있었어요. 그래서 공부 잘 못 했어요. 4단계까지는 합격했는데 5단계에서 떨어졌어요. 5단계 붙으려고 야간에 일하고 집에 와서 밤새 공부했는데…. 그래서 이고리가 어렸을 때 혼자 컸어요.”(옥사나 씨)

김영숙 센터장은 이주민들이 사회경제적 지위를 대물림받는 현실을 안타까워했다.

“고려인들은 현지 동화 정책으로 한국어가 서투르고 한국문화에 익숙지가 않아요. 좋은 일자리를 잡기가 힘들죠. F5비자를 받으려면 수업을 들어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는 고려인이 대부분입니다.”

고려인 비중이 높은 안산의 한 고등학교 교사도 사다리를 찾지 못하는 아이들을 걱정했다.

“고려인 아이들에게 앞으로 ‘뭐 하며 살고 싶냐’고 물어보면 ‘공장에서 일하며 돈을 벌겠다’고 말하는 경우가 많아요. 아이들은 부모가 하는 일을 보며 꿈을 키우는데, 마땅한 롤 모델이 없는 것이죠.”


(후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