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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세법학 100년의 역사의 시작
120여년의 역사와 전통을 간직하고 있는 연세대학교에서 법학강의가 처음으로 시작된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5년부터이다.
당시 연희전문에서는 민족의 독립을 열망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위해 000,000,000 등 선구적인 법학자들에 의해 상과(商科)에서 법학통론, 민법, 상법 등의 강의가 개설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도 청년 학생들이 독립 주권국가의 지도자로서 소양을 갖출 수 있도록 법학강의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이후 1940년대에는 문과(文科)와 신과(神科)에서도 법학원론, 헌법, 조선행정법, 국내법제와 같은 법학과목들이 개설되었다.
문과대학 내 법학과의 창설
연세대학교에서 본격적인 법학교육의 첫 출발이 이루어진 것은 1950년 5월 25일 문과대학 내에 법학과가 창설되어 50명 정원의 신입생을 대상으로 강의하였던 1950년 6월 1일이다.
그 후 25일 만에 발발한 한국전쟁의 와중에 법학교육은 정상적으로 이루어지기 어려웠고, 1952년 12월 당시 부산 피난시절 법학과의 재학생 수가 1학년 25명(여학생 1명 포함), 2학년 25명, 3학년 12명 등 총 62명에 불과하였다.
법학강의가 다시 정상화되기 시작한 것은 1953년 8월 부산 피난으로부터 학교가 서울로 복귀하면서부터이다. 당시 강의는 주로 학생회관에서 실시되었다.
정법대학 법학과로 개편
1954년 2월 교무위원회에서 정법대학을 신설하여 법학과와 정치외교학과를 그 산하에 두기로 결의함에 따라 문과대학에 소속되어 있던 법학과는 1954년 4월부터 정법대학의 법학과로 그 면모를 일신하였다. 또한 1956년 5월에 광복관이 준공되어 정법대학은 학생회관에서 광복관으로 이전하였고, 양호한 교육환경 속에서 면학 분위기도 크게 개선되었다. 1969년 3월에는 법률연구의 활성화를 위해 정법대학 부설 연구기관이었던 사회과학연구소에서 “법률문제연구소”를 분리하여 신설하였다.
1974년 12월 연세대학교 재미 재단인 미국기독교고등교육재단의 재정적 지원을 받아 우리나라에서는 최초로 “법률구조상담소”를 설치하여 국민에 대한 법률구조사업을 실시하는 동시에 법학도들에게 국민생활 속에 살아있는 법을 몸소 체험하여 배우는 기회를 마련하기도 하였다. 1969년 초 교수와 동문들을 주축으로 “법학과창립 20주년기념사업회”를 발족하여 법과대학의 독립을 추진하는 한편, 국가고시 준비를 하는 법학도를 위한 기숙사 건립비용을 모금하여 1979년 10월 지상 3층 연건평 382평 39실(수용인원 78명)의 건물을 완성하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법과대학으로의 독립
1970년대 중방부터 연세대학교는 기구개편위원회를 설치하여 효율적이며 합리적인 교육을 실시하기 위한 방안을 연구·검토하기 시작하였고, 법학교육의 발전을 위해서는 법과대학의 시신설이 더 이상 지체되어서는 안 된다는 지배적인 요구에 따라 1980년 12월 법과대학 신설안이 확정되었다.
이로써 법학과가 창설된지 30년 만에 연세대학교의 법학교육은 새로운 도약의 계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법과대학의 독립과 더불어 입학정원도 160명으로 증원되었으며, 졸업정원제도가 유지되는 기간 중에는 208명의 신입생을 모집할 수 있게 되었다. 그 결과 사법시험, 행정고시 등 각종 국가고시의 합격자 수가 현저히 증가되었으며, 학계 진출도 활발하게 이루어져 연세대학교 법과대학의 중흥기를 맞이하게 되었다. 한편 1982년 10월에는 서울캠퍼스와 별도로 원주캠퍼스에도 법학과가 신설되었다.
법과대학의 도약
1990년대 들어서면서 세계화·정보화시대가 도래함에 따라 법과대학은 이미 1993년 6월 “법과대학발전위원회”를 구성하여 연세 법과대학 비전 2010 계획을 수립하고, 법과대학의 교육목표를 수립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중장기 발전방향을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연세 법과대학 비전 2010’ 실천방안의 일환으로 국제적으로 관심이 고조되고 있는 지적 재산권 분야에서 법률적·기술적 측면의 전문지식을 겸비한 인력을 육성하기 위하여 1994년 2월 “특허법무대학원”이 개원하기에 이르렀고, 이후 법무대학원으로 개칭되었다. 국제적인 학술교류를 활발히 전개하기 위하여 1996년도에는 미국 Wisconsin대학교 동아시아법센터, 일본 쥬오대학교 법과대학, 독일 Munchen 대학교의 Max Planck연구소와, 1999년 12월에는 일본 홋카이도 법과대학과도 학술교류협력협적을 체결하였다.
1995년 3월부터 5월까지 몽골공화국의 대법관과 고등법원 판사에게 자유주의 법이론 교육을 실시함으로써 한·몽골간 유대강화에 이바지하였으며, 2002년 9월에 미국 American 대학교와 공동 LL.M, 과정 개설하는 등 세계화에 적합한 법학교육을 실천하고 있다. 1995년 12월 동문회를 중심으로 “연세법학창립50주년기념사업회”가 결성되어 새로운 교육공간 마련을 위한 건축기금 50억원 모금 운동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1998년 3월 연세법학관 신축계획 확정, 1999년 4월 설계가 완료, 2000년 4월 착공 및 2001년 12월 완공되어 최고의 교육시설을 갖추게 되었다. 또한 1998년 5월 김우중 총동문회장이 사법시험 준비생의 지원을 위해 20억원을 학교당국에 기부하였으며, 2000년 6월 연세법학진흥재단의 설립됨에 따라 법학도의 장학기금과 교수들의 연구 및 국제교류 지원여건이 마련되었다.
1996년 3월부터 법과대학 정원이 160명에서 210명으로, 2003년 3월부터 210명에서 259명으로 증원되어 대학의 규모가 확대되어 가고 있다.
또한 2000학년도 1학기부터 광역학부제가 실시됨에 따라 정원의 150%(이중전공 포함) 범위 내에서 신입생들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됨으로써 법과대학은 사실상 정원이 증원되는 효과를 누릴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법과대학의 재도약을 위해 수립한 연세 법과대학 비전 2010 계획에 필요한 물적, 인적 기본여건이 갖춰지게 되었으며, 이후 사립대학 최고의 사법시험 합격률을 달성하는 등 질적, 양적인 면에서 비약적인 성장을 거듭해 왔다.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의 출범
법학교육의 새로운 전기를 모색하기 위해 로스쿨제도의 도입이 꾸준히 논의되어 오던 중에 2007년 7월 여야합의로 이른바 ‘로스쿨법안’ 이 전격적으로 국회를 통과하면서 본격적으로 로스쿨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법과대학은 로스쿨제도의 도입을 앞두고서 일찍이 지난 2002년부터 현 광복관을 완공함과 아울러 다수의 우수교원을 초빙하는 등으로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을 위한 최고의 교육 및 연구 인프라의 구축을 위해 노력하였고, 시설면에서 2008년 5월에 완공된 법학도서관(연세,삼성학술정보관 5층)과 2008년 11월 완공된 광복관 별관(모의법정, 국제회의실)을 갖추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의 성과로 지난 2000년 한국대학교육협의회가 주관한 전국 법학과 평가에서 1위, 2008년 로스쿨 예비인가신청 대학평가에서 국내 사립대 1위 및 전체 2위를 차지하여 로스쿨시대를 선도하는 대학으로 확고하게 자리매김 하였다.
연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은 “연세LAW 세계LAW 1-10-1(로스쿨 출범과 동시에 국내최고, 10년 내 아시아 최고)”을 새로운 비전으로 설정하고서 글로벌시대에 국제경쟁력 있는 법조인의 양성을 통해서 한국법학의 전문화와 세계화의 시대적 소명을 성실하게 수행하고자 한다.